설염(雪焰)

눈이 옵니다.

지나간 어제를 벌써 잊어 버렸냐고

보란 듯이 하얀 세상, 몸 둘 바가 없습니다

화엄전(華嚴殿)가는 길의 세죽(細竹)에도 눈이 앉아,

서슬 푸른 댓잎 위에 녹지 않는 화두(話頭)처럼

서걱서걱 서로 부대끼며 제 삶을 곧추 세웁니다.

오지 않을 것 같아 믿음대신 가시울타리를 세우고

오실 이가 없을 것이므로 마중 가야 할 길에는

불신(不信)처럼 낙엽들이 바람을 따라 뒹굽니다.

내가 나를 버린 길, 그 폐허의 길 위로

그날처럼 눈이 옵니다.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으나

나는 이미 귀마저 지워버렸으므로

살아 생전 찾아 뵐 눈마저 잊어 버렸습니다.

절절(切切)하여 죽어서도 꼿꼿히 앉아

전해주고 싶으셨던 무언가 있었다기에,

에라이 에라이 후레자식처럼

값할 수 없는 위대한 유산 앞에 삼배 올립니다.

눈물이 나지 않으니 부릅뜨고 당신을 볼 밖에 일이 없습니다.

예의가 아니다 하시면, 잠시 눈뜨셔서 나무랄 일들을

간절히 간절히 기다립니다.

눈이 옵니다. 잊지 않아야 할,

살 에리도록 잊지 않아야 할 ,

그 위를 밟고 자욱도 없이

하얗게 걷는 그 풍경마저 뜨겁게 뜨겁게

불꽃처럼 안으며 가셨던 당신.

계정혜(戒定慧) 삼학을 의지하여 한 평생 올곧하게

정진하여 나아가신 당신의 영정 앞에 이 글을 바칩니다.

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

스님의 연꽃 다비화에 불이 당겨지자 눈발이 더욱 날리는 듯 했습니다. 대중들은 모두 일제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을 염(念)하였고, 저는 거화봉을 들고 불을 붙이시던 한 원로스님의 환한 웃음을 보았습니다. 그것은 참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었습니다.

한 죽음 곁에서 그렇게 환환 축복은 생전 처음이었습니다.

태어남보다 축복된, 살아온 날보다 축복된 단 하루! 그 죽음의 날.

참 뜨거우셨을 텐데도 오히려 저 세상엔 서슬 푸른 눈발로 가셨습니다.

순수하게 용맹스럽게 하라 항상 하시던 말씀처럼, 오히려 맵디 매운 서릿발로 불꽃을 엮어 용맹(勇猛)의 화로에 얹듯, 설산(雪山)이 품은 불꽃처럼, 그 설염(雪焰)을 내 흐릿한 동태눈에 점안(點眼)하시듯, 눈 깜박일 새도 없이 가셨습니다.